samedi 3 octobre 2009

창문 옆 가로등


어릴적엔 "추석? 그게 뭐?"
"타지에 있을때 가장 외롭고 서러울때가 추석같은 명절에 혼자 있는 거라는데" 라는 틀에 박힌 얘기들로 동정어린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눈꼽 만치도 동감 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부모님께는 전화를 드려야되는 날이라는 생각에 그 날을 놓치지나 말기를 바랬을 뿐...

그러다 세월이 좀 흘렀을땐, 추석같은 날이 되면  "어? 곧 추석이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듯 하지만 추석이 되기 보름도 더 전 부터 미리 감지 하고 있었다는것 자체가 의식을 했다는 뜻이었으려나 ?
그래도 그때까진 '참 이상도 하지 난 왜 그런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이런말을 궂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중얼거리곤 했으나 그렇다고 그게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던거 같다.
'뭐 한국에 있을때도 우리집은 역시 추석보다는 설이었지...' 이런 말도 함께...

그런데 올해는 느낌이 좀 다르다.
우선은 거의 한달전부터 곧 추석이라는 생각에 문득문득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 아마도 부모님을 못찾아 뵙는것에 대한 죄책감 이었으리라.
늙어만 가는 부모님께 잠시나마 외로운 감정을 안겨드린다는 생각에 죄송하기 그지 없다.
얼마전 인터넷 옜날신문란에서 추석이라 고향에 가기위해 한복을 차려입고 만원이 된 기차에 기어이 오르려 창문으로 들어가다 치마 저고리가 허벅지까지 올라간 처자의 순간 사진이 실린 70년대 어느 추석 서울역 귀성객들 풍경사진을 보며, 기분이 묘해졌었다.
사진이 빛바랜 흑백사진이라 감성을 더욱 자극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분명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지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게다가 한국시간으로 아침일찍 전화라도 드리려고 새벽에 아무도 받지않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자니  더 기분이 센치해지는것은 어쩔수가 없다. 그래서 올해는 아니 적어도 이순간만큼은 기분이 참 많이 별로다.

멍하니 앉아 전화기만 보고 있는다고 뭐가 나오는것도 아니고 창밖으로 보이는 백년은 족히 넘어보이는, 밤에 조명을 받으면 너무나 아름다워 처음 이사왔을때 부터 사진찍으려고 마음만 먹었던 교회가 떠올라 '때는 이때다 지금 해치우자' 싶어 카메라를 꺼내들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교회가 정면에 바로 보이면 좋으련만 측면으로 보이기때문에 여간 찍기 힘든것이 아니다.
얼굴을 쭉 내밀어야 볼수있는 구도라 삼발이도 가당찮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에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사진을 찍으니 며느리도 알수없는 심령사진이 되버린다.

그러다 뒤통수가 따가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작년까지만 해도 큼지막한 주사위 모양의 정육면체에 총알도 뚫을수 없을것 같은 두꺼운 투명유리로 된 70년대식 디자인이라 너무 맘에 들었는데 갑자기 최신식 모델로 바뀐 후 부터 쳐다보기도 싫었던 내방 창문 옆에 딱 달라붙어있는 가로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코앞에 붙어있어 맨눈으로는 눈이 부셔 바라 보기도 힘든 이 가로등이라면 야간에 손떨림 정도는 커버가 되겠다 싶어 카메라 꺼낸게 아까워 찍어줬다.
참 멋없고 못생긴 이 가로등, 도대체 자칭 타칭 예술의 나라라는 이곳에서 어떻게 저런 공업용 디자인이 버젓이 주택가에서 활개를 칠수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 한해 저 녀석때문에 여름밤 창문을 활짝 열어놔도 날파리 한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워낙 미친듯 휘황찬란한 빛을 내기에 모기들이 저 녀석에게 구애를 하느라 몇 센티 미터 떨어져 활짝 열려있는 내방에서 만찬을 즐기는것조차 잊었으니말이다..

그나저나 작년까지 있던 그 멋스럽고 운치있던 가로등 덮개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동네에 백개는 넘게있을 것 같던 것 들이  하루 아침에 다 사라지다니, 어짜피 버릴거면 달라고 해서 어항으로라도 쓸걸 그랬나?
참 별에 별 생각이 다 드는 새벽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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